평일 아침, 커피 한 잔을 들고 창밖을 본다. 차가운 빛이 회색 건물에 부딪혀 흘러내린다. 삶은 여전히 바쁘고, 머릿속은 업무와 기한으로 빼곡하다. ‘나’라는 감정은 점점 작은 조각으로 쪼개져, 일의 조각 속에 섞여 버린 듯하다. 감정을 느낄 틈도, 나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그렇게 나는 점점 무채색이 되어간다. 그러다 문득, 한 장의 그림이 나를 멈추게 했다. 형체 없이 얽힌 선들과 격렬하게 충돌하는 색들이 마치 내 감정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데, 이해되는 그런 그림. 그것은 칸딘스키의 추상화였다. 이 글은,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예술이 건네는 위로와 치유의 가능성을 말하고자 한다. 바쁜 삶 속에서 잠시 멈춰, 그림 한 점이 주는 감정의 숨결을 통해 다시 나를 회복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직장인 예술 힐링: 칸딘스키, 혼란의 세계에서 태어난 감정의 언어
나는 여전히 그의 그림 앞에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단순히 예쁘거나 잘 그렸다는 느낌이 아니라, 복잡한 감정이 설명 없이 밀려오고, 그 감정이 이상하게 나를 위로한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린 것일까? 왜 그토록 ‘보이지 않는 것’을 고집했을까? 칸딘스키는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엔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들어섰지만, 그는 30세가 되던 해에 갑자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모네의 <건초더미> 한 점을 보고 감정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형체는 희미했지만, 색채는 강렬했고, 그는 그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진동을 느꼈다. 그 감정은 인생의 방향을 바꿀 만큼 강력했다. 그는 미술이 언어처럼 어떤 메시지를 전하거나, 풍경을 재현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미술은 ‘영혼을 위한 소리’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 믿음은 그를 ‘형체 없는 감정’의 세계로 이끌었고, 결국 그는 세계 최초의 추상화를 탄생시킨 인물이 되었다. 그의 그림에는 선명한 구상도, 구체적인 서사도 없다. 그러나 색과 선이 만들어내는 리듬은 음악처럼 감정의 공명을 일으킨다. 붉은 선은 분노, 파란 원은 침묵, 노란 사각형은 불안. 그는 색과 감정을 연결 지었고, 그 색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은 그의 감정 상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이러한 예술 세계는 혼란의 시대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칸딘스키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나치 정권 아래에서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그가 몸담았던 바우하우스는 폐쇄되었고, 나치에게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현실의 폭력성에서 도망치지 않았고, 오히려 내면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추상을 택했다. 그의 작품은 단지 ‘예쁘고 신기한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과 혼돈, 고독과 생명력을 담은 시각적 심포니이며, 시대의 억압을 이겨낸 정신의 기록이다. 칸딘스키는 말한다. "진정한 예술은 시대의 껍데기를 벗겨낸, 인간의 영혼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 모두를 위한 예술이며, 특히 정서적으로 고립되기 쉬운 직장인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추상미술, 이름 없는 감정을 위한 창문
“오늘 기분이 어때?”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날이 있다. 머리는 무겁고, 몸은 피곤하고, 말은 입안에서 맴돌 뿐이다. 감정이 있는 건 알겠는데, 어떤 감정인지 모를 때. 추상미술은 바로 그런 순간에 나를 도와준다. 직장인으로서의 삶은 감정보다 기능이 중요시되는 세계에 속해 있다. 문제 해결, 성과 중심, 효율성, 책임. 그 안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꺼내는 일이 종종 사치처럼 여겨진다. 감정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비전문적 요소'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억눌린 감정은 쌓이고,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결국 몸과 마음에 균열을 만든다. 그럴 때, 칸딘스키의 그림을 본다.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얽히고설켜 있다. 기쁨, 불안, 기대, 두려움, 생명력. 구체적인 형태 없이도 색과 선이 감정을 자극한다. 이때 중요한 건 그림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주었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어떤 감정을 꺼내게 했는가'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감정 투사’라고 부른다. 사람은 외부 자극을 통해 자기 내면을 비추게 되며, 추상미술은 그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한다. 구체적인 메시지가 없기에 오히려 자신의 상태에 따라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다. 같은 그림이라도 어떤 날은 분노가, 어떤 날은 위로가 느껴진다. 나는 종종 퇴근 후, 칸딘스키의 <즉흥 31번>을 바라본다. 거기엔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날카로운 선들이 교차하고, 생생한 색들이 충돌하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그 그림을 보면 내 안의 응어리가 조금씩 흐트러지는 느낌이다.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조금씩 풀려나간다. 추상미술은 감정의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감정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치유의 첫걸음이다.
예술과 마음 챙김, 현대인의 감정 회복법
마음 챙김이란 결국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태도다. 감정이 흐르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생각을 흘려보내는 연습. 바쁜 직장인의 삶에서 이 마음 챙김은 사치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야말로 직장인의 삶을 유지시켜 주는 핵심이다. 예술은 가장 조용하면서도 깊이 있는 마음 챙김 도구다. 그중에서도 추상미술은 머리를 쓸 필요 없이, 오로지 감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드문 공간이다. 칸딘스키의 작품을 바라보는 5분, 그건 감정의 경청이자 자아와의 소통이다. 그림을 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타인의 기대도, 업무의 압박도 잊고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지금, 내가 이 색을 어떻게 느끼는지. 지금, 이 선이 나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듣게 된다. 또한 그는 음악을 사랑했고, 그림에서 음악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그림은 리듬을 품고 있고, 그 리듬은 우리의 심박과 감정을 조율한다. 붉은 파형은 흥분을, 푸른 원형은 고요를, 노란 점은 긴장을 나타낸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명상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5분간 조용히 예술을 감상해 보자. 칸딘스키의 그림 한 점을 핸드폰 화면에 띄우고, 잠시 침묵 속에 머물러 본다. 무엇을 분석하거나 이해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그 색과 선을 통해, 오늘 하루 내가 얼마나 많은 감정을 억눌렀는지 떠올려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달라진다.
예술은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질문을 하게 만든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나는 내 감정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정말 내 삶을 살고 있는가? 직장인은 감정을 가릴 수밖에 없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감정 없는 삶은 가능하지 않다. 감정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삶의 가장 원초적인 언어다. 칸딘스키의 추상은 그 감정을 회복하게 해 준다.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없어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그림 앞에서, 우리는 다시 인간이 된다. 정답을 내려놓고, 느낌을 받아들이며,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출 수 있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 감정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큰 치유다. 그리고 예술은 그 시작을 도와주는 도구다. 칸딘스키는 결국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 안의 세계는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세계를, 이제 마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