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눈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선다.” 그 눈이 나를 보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 눈을 보는 걸까. 어릴 적 나는 할머니 댁 벽에 걸린 낡은 초상화 속 인물의 눈이 이상하리만치 생생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언제 봐도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고, 그 시선이 두려우면서도 끌렸다. 말 한마디 없이 보고 있지만 모든 걸 꿰뚫는 듯한 눈이었다. 그렇게 나는, 미술 속 ‘눈’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은 단순한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정신이기도 하고, 화가의 무의식이며,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 각각의 문화와 신념 체계 속에서 눈은 전혀 다른 의미로 형상화되며, 인간 존재의 깊은 층위를 건드린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미술 속 눈이 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천천히 들여다보려 한다. 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이며,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은 앞으로 ‘미술을 읽는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될 것이다.
동서양 미술에서 눈의 상징 - 종교적 상징으로서의 눈
서양의 오래된 성당 천장 한가운데, 정삼각형 안에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 속에서, 그 눈은 무언가 신성하면서도 위협적인 느낌을 준다. 그것은 바로 ‘Eye of Providence’ — 전지전능한 신의 눈이다. 서양 미술에서 눈은 신의 시선, 즉 감시와 심판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한다. 특히 르네상스 이후의 종교화에서는 눈이 권위의 중심에 자리 잡으며, 인간의 행동을 감찰하는 역할을 한다. 신은 인간을 언제나 보고 있다. 이 시선은 인간의 죄와 구원을 동시에 겨냥한다. 그 결과, 눈은 미술 속에서 단순한 장식이 아닌 ‘초월적 존재의 증표’가 된다. 그에 반해 동양에서는 눈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다르다. 불상이나 도상의 눈은 감시가 아니라 깨달음이다. 반쯤 감긴 눈은 ‘세속’과 ‘초월’을 동시에 응시하는 존재를 상징하며, 명상과 자비, 그리고 ‘내면적 시선’을 표현한다. 특히 제3의 눈 또는 천안 개념은 동양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인간이 단지 보는 것을 넘어서 ‘깨닫는 눈’을 갖게 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차이는 단지 미술 양식의 차이가 아니다. 서양은 신을 외부에 두고 바라본다면, 동양은 신성을 인간 안에서 찾는다. 따라서 눈은 감시와 경외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자비와 통찰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양쪽 모두에서 눈은 궁극적으로 ‘존재를 꿰뚫는 상징’이다. 그러나 그 꿰뚫음의 방식은 문화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빛난다. 서양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라면, 동양은 안에서 밖으로 퍼지는 빛이다.
감정을 담는 눈
“그림 속 눈이 울고 있어.” 나는 렘브란트의 초상화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색채도, 명암도, 구도도 아닌, 그 눈 하나에 모든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눈은 가장 작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는 부분이다. 슬픔, 분노, 고독, 희망, 체념… 감정의 총량이 가장 응축된 자리에, 화가들은 가장 많은 애정을 쏟는다. 서양 미술은 특히 사실주의적 접근을 통해 인물의 심리와 감정을 눈을 중심으로 묘사했다. 고흐의 자화상 속 눈빛에는 광기와 외로움이 동시에 흐른다. 그의 고통은 붓질보다, 눈동자의 흔들림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눈은 그 사람의 존재론적 질문이 응축된 지점이며, 그 응시는 관람자를 가만히 흔들어놓는다. 동양 미술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민화나 수묵화 속 인물과 동물의 눈은 자세히 묘사되기보다는 간결하고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엄청난 감정의 파장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호랑이 민화의 날카로운 눈빛은 단지 무서움을 넘어서, 민중의 소망과 두려움, 생명력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다. 동양은 감정을 직접 그리는 대신, 눈의 위치, 흐름, 여백을 통해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 차이는 ‘감정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온다. 서양은 감정을 외부화하고 분석하려 했고, 동양은 감정을 은유적으로,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서양의 눈은 말하고 싶어 하지만, 동양의 눈은 ‘말하지 않음’으로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눈은 거짓말을 못 한다고 한다. 그 말은 그림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진실한 감정은 눈에서 먼저 시작된다.
상상을 관통하는 눈
시간이 멈춘 듯한 한 캔버스 앞에 서면, 가끔 현실이 비틀린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눈은 녹아내리고, 찢기고, 여러 개로 나뉘어 부유한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 너머, 상상과 무의식의 풍경이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눈을 단순히 ‘보는 기관’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들에게 눈은 ‘내면을 보여주는 통로’, 즉 무의식의 스크린이었다. 달리, 마그리트, 에른스트의 작품 속 눈은 꿈을 형상화한 것이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열쇠다. 동양의 현대 미술에서도 유사한 시도가 나타난다. 일본 애니메이션,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속 인물들은 유독 큰 눈을 가지고 있다. 이 과장된 눈은 단순히 미적인 요소가 아니라, 감정과 존재의 강조 장치다. 눈은 그 인물의 영혼이자 메시지의 핵심이며, 관람자는 그 눈을 통해 이야기와 감정에 몰입하게 된다. 이처럼 눈은 상상력을 시각화하는 도구가 되었고, 이제는 미술을 넘어 대중문화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보다’는 행위는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 철학적 인식의 출발점이 되었다. 화가는 그 눈에 꿈을, 시대를, 철학을 담는다. 그림 속 눈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들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결론
눈은 인간 존재의 집약체다. 신의 시선, 감정의 그릇, 상상의 도구 —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작은 형태 속에 시대의 믿음, 화가의 고뇌, 인간의 본질이 담겨 있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눈을 전혀 다른 의미로 조형했지만, 궁극적으로 ‘보다’는 행위는 ‘이해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림 속 눈을 볼 줄 아는 사람은,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제 미술 작품 속 눈을 마주할 때, 단순히 형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역사, 꿈을 읽어보자. 그것은 예술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가장 깊은 통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