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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말이 자동처럼 나왔던 시간들을 돌아보다

by mynews48106 2026. 2. 2.

‘괜찮아’라는 말이 진심이어서가 아니라, 더 묻지 않게 만들기 위해 먼저 나가던 시기가 있었다. 질문을 받으면 생각보다 대답이 앞섰고, 그 대답은 내 상태를 확인한 결과라기보다 대화를 빨리 통과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 이 글은 감정 목록을 늘어놓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왜 ‘괜찮아’라는 말을 안전한 방패처럼 쓰게 됐는지, 그 말이 나를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신호들을 가려버렸는지를 ‘언어의 습관’이라는 관점에서 되짚어보는 기록이다. 말 한마디가 관계를 편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그 말이 반복되면 내 안의 질문까지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자동반응이 멈추기 시작한 자리에서, 나는 어떤 새로운 언어를 배우게 됐는지도 차분히 정리해 본다.

 

괜찮아?를 메모지에 쓰는 손

‘괜찮아’가 먼저 나오는 사람으로 살던 시절

한동안 나는 질문을 받으면 거의 반사적으로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말이 입에서 먼저 튀어나오고, 그다음에야 ‘아, 내가 방금 또 그렇게 말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식이었다. 그 대답이 거짓말이라고 느끼지는 않았다. 크게 아픈 것도 아니고, 당장 무너진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은 해내고 있었고, 생활은 겉보기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아’는 언제나 안전한 답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편해질수록 내 하루는 더 단순해졌다. “요즘 어때?” “괜찮아.” “힘들지 않아?” “괜찮아.” 대화는 매끄럽게 끝났고, 상대도 안심했다. 무엇보다 내가 덜 노출됐다. 설명하지 않아도 됐고, 이유를 정리하지 않아도 됐고, 내 마음의 표정을 굳이 꺼내 보일 필요도 없었다. 그 시기의 나에게는 그게 큰 장점이었다. 왜냐하면 ‘내 상태를 말로 만드는 일’ 자체가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솔직해져야 한다” 같은 결론으로 가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설명을 아끼게 됐는지, 왜 ‘괜찮아’가 내 입에 붙어버렸는지, 그 말이 나를 지켜준 방식과 동시에 가려버린 것들을 함께 바라보려는 기록이다. 어떤 말이 습관이 되면, 그 말은 상대만 속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꽤 조용한 순간에 깨달았다.

괜찮다는 말이 자동반응이 된 이유

내가 ‘괜찮아’를 자동반응처럼 쓰게 된 데에는 의외로 큰 사건이 없었다. 오히려 별일이 없어서 더 빨리 굳어졌다. 바쁘지도, 아주 힘들지도 않은데 묘하게 여유가 없는 날들이 이어지던 때였다. 그때 나는 설명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말을 꺼내면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고, 길어지면 내가 감당해야 할 감정의 조각들이 늘어날 것 같았다. 결국 ‘괜찮아’는 감정을 숨기는 말이 아니라, 상황의 길이를 줄이는 말이 됐다. 가끔은 “괜찮아”라고 말하면 내 표정까지 같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불편함이 있어도, 애매한 피로가 있어도, 그 말이 나오면 일단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말이 나를 대신 정리해 주는 느낌. 특히 친한 사람 앞에서 더 그랬다. 가까울수록 설명이 더 필요해지고, 설명이 필요할수록 내가 꺼내야 할 게 많아지니까. 그래서 나는 친한 사람에게 더 자주 “괜찮아”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편한 관계에서 가장 빨리 ‘말을 줄이는 방식’이 굳어졌다. 또 한 가지는, 내가 ‘상대의 마음’을 먼저 계산하는 습관이 있었다는 점이다. “괜찮지 않다”라고 말하면 상대가 걱정할까, 분위기가 무거워질까, 그다음 질문이 이어질까. 그 모든 가능성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괜찮아.” 이 말은 상대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대화를 단축시키는 버튼 같은 역할을 했다. 그 버튼을 누르면 더 이상 열어볼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그 버튼을 너무 자주 누르다 보니, ‘열어봐야 하는 순간’까지도 그냥 닫아버리게 됐다는 것이다. 그 시기에는 내 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누가 묻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에게 묻기 전에 먼저 대답을 내놓았다. “괜찮아.” 이 말은 점검의 결과가 아니라 점검을 건너뛰기 위한 언어가 되었다. 몸이 피곤해도, 마음이 무거워도, 집중이 풀려도, 나는 “괜찮아”로 정리했다. 처음에는 합리적이었다. 정말 큰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괜찮음’의 기준이 흐려졌다. 정말 괜찮은 상태와,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는 상태가 구분되지 않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솔직하지 않아서 괜찮다고 말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솔직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무난한 언어를 선택했을 뿐이다. 내 상태를 정확히 설명하려면 생각해야 했고, 판단해야 했고, 때로는 선택을 바꿔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때의 나는 그 에너지가 부족했다. 그래서 ‘괜찮아’는 거짓말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언어가 됐다. 다만 그 임시가 너무 길어졌고, 그 사이에 내 상태는 점점 더 점검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자동 대답이 멈춘 자리에서 생긴 새로운 언어

변화는 “이제부터는 솔직해질 거야” 같은 거창한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작은 멈춤에서 시작됐다. 질문을 받았을 때 바로 대답하지 않고, 1초만 늦추는 순간. 그 짧은 간격에 “진짜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처음으로 들어왔다. 어떤 날은 정말 괜찮았다. 그리고 어떤 날은 ‘괜찮다’가 아니라 ‘넘어가고 싶다’가 더 정확했다. 그 차이를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내 하루의 해석이 달라졌다.

나는 이후로 모든 상황에서 감정을 자세히 말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대신 ‘괜찮아’를 말하기 전에 이것만 확인했다. 이 말이 자동인가, 선택인가. 자동일 때는 보통 내가 피곤하거나, 설명할 여유가 없거나, 혹은 내 안의 질문을 건너뛰고 싶을 때였다. 그걸 알게 되자 “괜찮아”는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내 상태를 알려주는 표지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아”가 먼저 튀어나오면, 오히려 그 순간이 내가 점검을 해야 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괜찮다는 말은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그 말이 습관이 아니라 판단이 될 때, 언어는 나를 보호하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 도구를 좀 더 천천히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여전히 “괜찮아”로 끝내고 싶다. 그럴 때도 있다. 다만 이제는 그 말 뒤에 나를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의 ‘괜찮아’는 통과용인지, 회복 가능한 상태인지—그 정도는 내가 나에게 물어볼 수 있게 됐다. 마지막으로, 조금 다른 톤으로 남기고 싶다. “괜찮아”가 자동이었던 시기는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이 그 말밖에 없었던 시간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기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이제는 내 안의 질문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속도로 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