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라는 말이 진심이어서가 아니라, 더 묻지 않게 만들기 위해 먼저 나가던 시기가 있었다. 질문을 받으면 생각보다 대답이 앞섰고, 그 대답은 내 상태를 확인한 결과라기보다 대화를 빨리 통과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 이 글은 감정 목록을 늘어놓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왜 ‘괜찮아’라는 말을 안전한 방패처럼 쓰게 됐는지, 그 말이 나를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신호들을 가려버렸는지를 ‘언어의 습관’이라는 관점에서 되짚어보는 기록이다. 말 한마디가 관계를 편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그 말이 반복되면 내 안의 질문까지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자동반응이 멈추기 시작한 자리에서, 나는 어떤 새로운 언어를 배우게 됐는지도 차분히 정리해 본다.

‘괜찮아’가 먼저 나오는 사람으로 살던 시절
한동안 나는 질문을 받으면 거의 반사적으로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말이 입에서 먼저 튀어나오고, 그다음에야 ‘아, 내가 방금 또 그렇게 말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식이었다. 그 대답이 거짓말이라고 느끼지는 않았다. 크게 아픈 것도 아니고, 당장 무너진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은 해내고 있었고, 생활은 겉보기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아’는 언제나 안전한 답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편해질수록 내 하루는 더 단순해졌다. “요즘 어때?” “괜찮아.” “힘들지 않아?” “괜찮아.” 대화는 매끄럽게 끝났고, 상대도 안심했다. 무엇보다 내가 덜 노출됐다. 설명하지 않아도 됐고, 이유를 정리하지 않아도 됐고, 내 마음의 표정을 굳이 꺼내 보일 필요도 없었다. 그 시기의 나에게는 그게 큰 장점이었다. 왜냐하면 ‘내 상태를 말로 만드는 일’ 자체가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솔직해져야 한다” 같은 결론으로 가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설명을 아끼게 됐는지, 왜 ‘괜찮아’가 내 입에 붙어버렸는지, 그 말이 나를 지켜준 방식과 동시에 가려버린 것들을 함께 바라보려는 기록이다. 어떤 말이 습관이 되면, 그 말은 상대만 속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꽤 조용한 순간에 깨달았다.
괜찮다는 말이 자동반응이 된 이유
내가 ‘괜찮아’를 자동반응처럼 쓰게 된 데에는 의외로 큰 사건이 없었다. 오히려 별일이 없어서 더 빨리 굳어졌다. 바쁘지도, 아주 힘들지도 않은데 묘하게 여유가 없는 날들이 이어지던 때였다. 그때 나는 설명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말을 꺼내면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고, 길어지면 내가 감당해야 할 감정의 조각들이 늘어날 것 같았다. 결국 ‘괜찮아’는 감정을 숨기는 말이 아니라, 상황의 길이를 줄이는 말이 됐다. 가끔은 “괜찮아”라고 말하면 내 표정까지 같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불편함이 있어도, 애매한 피로가 있어도, 그 말이 나오면 일단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말이 나를 대신 정리해 주는 느낌. 특히 친한 사람 앞에서 더 그랬다. 가까울수록 설명이 더 필요해지고, 설명이 필요할수록 내가 꺼내야 할 게 많아지니까. 그래서 나는 친한 사람에게 더 자주 “괜찮아”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편한 관계에서 가장 빨리 ‘말을 줄이는 방식’이 굳어졌다. 또 한 가지는, 내가 ‘상대의 마음’을 먼저 계산하는 습관이 있었다는 점이다. “괜찮지 않다”라고 말하면 상대가 걱정할까, 분위기가 무거워질까, 그다음 질문이 이어질까. 그 모든 가능성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괜찮아.” 이 말은 상대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대화를 단축시키는 버튼 같은 역할을 했다. 그 버튼을 누르면 더 이상 열어볼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그 버튼을 너무 자주 누르다 보니, ‘열어봐야 하는 순간’까지도 그냥 닫아버리게 됐다는 것이다. 그 시기에는 내 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누가 묻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에게 묻기 전에 먼저 대답을 내놓았다. “괜찮아.” 이 말은 점검의 결과가 아니라 점검을 건너뛰기 위한 언어가 되었다. 몸이 피곤해도, 마음이 무거워도, 집중이 풀려도, 나는 “괜찮아”로 정리했다. 처음에는 합리적이었다. 정말 큰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괜찮음’의 기준이 흐려졌다. 정말 괜찮은 상태와,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는 상태가 구분되지 않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솔직하지 않아서 괜찮다고 말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솔직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무난한 언어를 선택했을 뿐이다. 내 상태를 정확히 설명하려면 생각해야 했고, 판단해야 했고, 때로는 선택을 바꿔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때의 나는 그 에너지가 부족했다. 그래서 ‘괜찮아’는 거짓말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언어가 됐다. 다만 그 임시가 너무 길어졌고, 그 사이에 내 상태는 점점 더 점검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자동 대답이 멈춘 자리에서 생긴 새로운 언어
변화는 “이제부터는 솔직해질 거야” 같은 거창한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작은 멈춤에서 시작됐다. 질문을 받았을 때 바로 대답하지 않고, 1초만 늦추는 순간. 그 짧은 간격에 “진짜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처음으로 들어왔다. 어떤 날은 정말 괜찮았다. 그리고 어떤 날은 ‘괜찮다’가 아니라 ‘넘어가고 싶다’가 더 정확했다. 그 차이를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내 하루의 해석이 달라졌다.
나는 이후로 모든 상황에서 감정을 자세히 말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대신 ‘괜찮아’를 말하기 전에 이것만 확인했다. 이 말이 자동인가, 선택인가. 자동일 때는 보통 내가 피곤하거나, 설명할 여유가 없거나, 혹은 내 안의 질문을 건너뛰고 싶을 때였다. 그걸 알게 되자 “괜찮아”는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내 상태를 알려주는 표지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아”가 먼저 튀어나오면, 오히려 그 순간이 내가 점검을 해야 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괜찮다는 말은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그 말이 습관이 아니라 판단이 될 때, 언어는 나를 보호하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 도구를 좀 더 천천히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여전히 “괜찮아”로 끝내고 싶다. 그럴 때도 있다. 다만 이제는 그 말 뒤에 나를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의 ‘괜찮아’는 통과용인지, 회복 가능한 상태인지—그 정도는 내가 나에게 물어볼 수 있게 됐다. 마지막으로, 조금 다른 톤으로 남기고 싶다. “괜찮아”가 자동이었던 시기는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이 그 말밖에 없었던 시간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기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이제는 내 안의 질문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속도로 살려고 한다.